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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모험 정신 앞세워 ‘한국 미라’ 연구 분야를 개척하다


김한겸 고려대 의대 병리과 교수

고려대 의대 구로병원에 가면 ‘기인(奇人)’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공사장이나 오래된 무덤에서 우연히 썩지 않은 시신 하나가 나왔단 소식이 들리면 산으로 들로 쫓아가 그 시신을 업고 온다. 
그 시신을 X선 촬영하고, CT(컴퓨터단층촬영) 장비로 온몸 구석구석을 찍는다. 
그래도 성이 안 차면 칼을 들고 온 몸을 부검한다. 
수백년 전에 죽은 시신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과학적 연구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김한겸 고려대 의대 병리과 교수. 
그는 국내 의학계 리더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모든 병리의사들이 모이는 ‘대한병리학회’ 이사장을 지냈고, 고려대에선 부총장급 직함인 학생처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고려대 의대 병리과 교수를 역임하며 동시에 국가지정 인체유래검체거점은행장과 연구용동결폐조직은행장, 보건복지부 보건의료기술 정책심의위원회 위원,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이사, 대한암협회 집행이사, 한국교수검사회장 등 수많은 분야에서 직책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2013년에는 운동선수의 약물 복용 금지를 위한 도핑검사와 교육홍보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한국도핑방지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명함에 직함을 쓸 자리가 모자랄 만큼 의학계 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의학·과학계를 이끌고 있는 인사다.

이비인후과 진료 받으며 의사에 처음 매력 느껴

김 교수는 서울이 고향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60세이니 1950, 60년대 유년기를 보냈다.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에서 태어나 엄한 유교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 시절이면 집만 서울이었지, 밤이 되면 전기가 나가고,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은하수를 바라보고 잠을 청하곤 했다.
집안에 외양간도 있었고, 심심하면 미나리밭, 배추밭을 뛰어다니면서 자랐다.

그가 의사의 길을 결정한 건 어릴 때 심하게 앓았던 중이염이 계기가 됐다. 
증세가 너무 심해 청력을 잃을 뻔하기도 했는데, 그때 만난 한 이비인후과 의사가 그를 성심으로 치료해 준 덕분에 완치할 수 있었다. 
료 받으려고 종로 2가까지 전차(당시엔 지하철이 아니라 시내를 가로 지르는 전동버스가 다녔다)를 타고 다니곤 했는데,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그 모습에 반해 의사가 되고 싶은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고등학교 때 영화나 TV를 보면서 그 꿈이 굳어졌다. 
“실력이 뛰어난 의사가 모함을 당해 여러 도시로 도망 다니며 환자를 만나면서 치료해주는 내용의 외화 시리즈 ‘도망자’나 법의관이 범죄사건을 해결하는 영화 ‘닥터 퀸시’를 손에 땀을 쥐고 봤다”고 했다.

이런 꿈은 자연스럽게 의대 진학으로 이어졌다. 
활발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고등학교 때는 문학클럽 활동도 했었다.
매주 모여서 단편문학 책을 읽고 비평하는 모임이었다. 
이 당시 우리나라 단편문학을 거의 다 섭렵하게 됐고, 토론하는 능력과 사고력을 키우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

그는 스스로 “학창시절에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고 중간 정도였다”고 했지만 아마도 겸손에서 나온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는 당시 명문으로 불리던 경동고를 졸업했다. 
이 학교는 매년 서울대에 100명 이상 진학하곤 했던 ‘초우량 진학고’로 꼽혔다. 
이 학교에서 반에서 10등 안에 들면 다른 학교 전교 1등과 맞먹는단 말이 있었을 정도다.

정형외과 포기하고 차선책이던 ‘병리학자’ 길 선택

고려대 의대에 진학한 김 교수는 대학생활을 시작하며 검도에 눈을 돌렸다. 
실제로 김 교수의 특기 중 하나는 검도다.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7단의 고단자로 대한검도회 이사를 맡고 있을 정도. 
그는 중학교 때부터 검도를 배웠고, 대학교 예과(1~2학년) 때는 학교공부를 뒤로 하고 미친 듯이 수련에 집중했다. 
선배들로부터 본과에(일반 대학 3학년 이후)에 진학하면 운동할 틈이 없으니 지금 하고 싶은 운동을 열심히 하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승단시험을 보지 않고 중학교 때부터 취미로 해 왔던 검도였는데 그시기에 거의 매년 1단씩 승단했다. 
의대 6년을 졸업을 할 때는 4단이 돼 있었다. 
고려대 혜화캠퍼스 내에 검도부를 처음 만든 것도 그였다.

본과에 진학한 뒤 운동을 줄이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을 무렵, 그는 생각지도 못한 학생회장을 맡게 됐다. 
이 일이 이후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후회하는 건 아닙니다만, 학생회장을 하면서 성적이 급격히 떨어졌어요. 
이왕 시작한 것이고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다 보니 제대로 하고 싶었던 거죠. 
가을에 ‘호위제’란 이름의 축제를 기획해 만들기도 했고, 가을에 하던 체육대회를 봄 축제로 바꿔 놓는 등 많은 일을 했지요.”

결국 그는 졸업 후 대학병원 수련의 시절 가장 지망하고 싶던 정형외과 지원을 포기해야 했다. 
학교 성적이 나쁜 것이 원인이 돼, 신입의사를 뽑는 인원수(TO)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미리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차선책으로 생각하던 병리과를 선택했다. 
그는 지금에 와선 “그 당시 병리과를 선택한 것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막상 공부해 보니 병리학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글자로만 배워 이해가 잘 안 됐던 의학지식들이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미경으로 세포도 관찰하고, 부검도 하고, 그 사이사이에 짬짬이 법의학 공부도 병행했다. 
기초의학자로서 의사 교육, 사인규명 업무도 재미가 있었다.

군 생활은 병리학 전문의를 딴 다음 육군과학수대에서 근무했는데, 감식, 필적감정, 거짓말탐지 검사, 사진, 증거, 익사체 검사, 강간 등 수사 과정에서 필요한 의학지식을 익힐 수 있었다. 
심지어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총기사고 증상도 공부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쌓인 병리학, 법의학적 지식이 결국 미라연구자로 발돋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병리학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라탐구

김 교수의 미라 관련 연구는 사실 개인적인 흥미에서 비롯됐다. 
그가 미라를 처음 만난 곳은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에 이집트 미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전시관은 이집트 현장을 그대로 옮겨온 듯 퀴퀴하고 냄새도 났다. 
하지만 어쩐지 미라에 흥미가 끌려 여러 차례 찾아가서 구경하곤 했다.

이렇게 막연히 미라에 흥미를 갖고 있던 시절, 그는 1996년 한 ‘폐병리학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학회에서 특강을 했던 사람이 고(古)병리학 전문가였다. 
런던대에서 왔다는 그 병리학자는 병리학자로서 미라를 연구하며 영국 왕실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선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라 전문가를 영국에선 귀족으로 대우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막연히 부러웠다. 
이를 계기로 김 교수는 개인적으로 고병리학을 공부하며 지식을 쌓아 나갔다.

그러던 중 2001년 우연찮게 발견된 미라 한 구가 김 교수 앞으로 도착했다. 
지금도 몇 사람 안 되지만, 당시엔 국내에서 미라 전문가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 
그 미라가 바로 그 유명한 ‘파평윤씨’ 미라다. 
산모가 태아를 출산하다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사례로, 복중에 태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미라였다.

이 미라 연구는 고려대 연구진이 총 동원돼 시행됐고, 이 연구를 앞장서서 진행한 김 교수는 이후 ‘미라 전문가’ 반열에 올랐다. 
그 이후 미라가 발견됐다고 하면 대부분 김 교수 앞으로 전달돼 온다. 
현재 대전 계룡산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학봉장군 미라, 여러 언론에 소개되며 큰 관심을 모은 나주미라, 오산미라 등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이와 동시에 김 교수는 세계 여러 나라를 찾아가 그들만의 미라 연구방법을 살펴보고 또 그 나라 학계의 미라 연구 방법을 공부하곤 했다.
중국을 찾아가 한국 미라와 가장 유사하다는 마왕두이(馬王堆) 미라를 살펴보았고, 사막에서 자주 발견되는 건조미라를 살펴보기 위해 칠레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또 알프스 산맥에서 꽁꽁 언 채 수천 년 동안 보관된 미라 ‘아이스맨 외치’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까지 다녀왔다.

그가 주로 연구하는 것은 미라의 사인 규명이다. 
이 미라는 이 시기에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됐을까. 그
원인을 밝혀 현대 의학발전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500년 전 조선시대에 죽은 미라가 기생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기생충의 종류까지 알아낼 수 있다면, 이런 정보는 현대에 기생충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좋은 연구자의 기본은 끝없이 의문을 갖는 것

김 교수는 학생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요즘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대부분 수동적인 게 문제”라며 “어떤 점에 대해 끊임없이 원론적인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식이 부족하다면 무조건 따라가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자신이 흥미를 갖는 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는 더욱 중요하다. 
스스로 주도적으로 의문을 갖고 공부하는 태도가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실제로 그가 국내 미라 연구를 개척하지 않았다면 국내에 미라 전문가가 배출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김 교수는 “지금도 연구를 완전히 끝내지 못한 미라를 7구나 가지고 있다”며 “이런 미라를 추가로 연구하는 한편, 2000년대 구식 현미경으로 촬영했던 조직표본 등을 다시 촬영해 첨단 디지털 자료로도 남겨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열악한 미라 연구 환경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외국에선 미라가 새로 발견됐다고 하면 연구용으로 서로 가지고 가질 못해서 난리가 날 정도라는 것. 
하지만 우리나라는 시신이라는 이유로 부장품(의복, 노리개 등)만 벗겨가고 일체 관심을 갖지 않는 분위기다. 
미라가 중요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알고, 국공립 박물관 등에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여러 미라를 연구했지만 일체의 외부 연구비 등을 받은 적이 없을 정도에요. 
철저히 개인적으로 연구해 왔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춰진 만큼 문화계, 과학계 등이 서로 협조해 고병리학 연구에서도 선진국으로 발돋움 할 때가 됐습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995&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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