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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열정과 희망 앞에 불가능은 없다


김자겸 한국수자원공사(K-water) 해외사업처 전문위원

“만 41세에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 유학 길을 떠났습니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직후의 일이었어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열정입니다.”

열정 넘치는 삶을 살아온 김자겸 한국수자원공사(K-water) 해외사업처 전문위원은 뜨거운 열정을 식힐 수 있는 물 분야에서 독보적인 길을 걸어왔다. 
국내 대규모 수도 시설을 구축하는 데 관여했으며, 해외 수도사업에도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이제 물 분야의 연구란 무엇이며, 김위원이 이 길에서 겪었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악동, 과학자를 꿈꾸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라는 말을 듣고도 잘 실감하지 못한다. 
주로 먹고 마시는 물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은 자동차를 만들 때나 옷, 장난감 등을 만들 때도 필요하다. 
심지어 석유를 만드는 데도 많은 물이 쓰인다. 
물을 잘 쓰기 위한 연구와 기술 개발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고 김 위원이 어릴 적부터 물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은 아니다.

“어릴 적엔 제가 물 분야에서 기술개발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하지 못했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무지하게 말을 안 듣던 학생이었거든요. 
선생님은 물론이고 부모님 말도 듣지 않았어요.”

그 시절 김 위원은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 
부친이 광산업을 하다가 잘못돼서 집안 살림이 송두리째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하는 성미에 고집만 늘고 말았다. 
유난한 호기심에 술, 담배도 몰래 경험했다.

“지금 생각하면 저를 끝까지 믿어준 아버지께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번은 제대로 걸려서 학교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걱정 말라시며 다만 건강에 나쁜 건 많이 하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아버지의 믿음처럼 김 위원은 스스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는 눈이 생겼다. 
더 하다간 ‘나 자신에게 손해가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피처는 과학소설(SF)이었다.
우주정거장을 선망하고 UFO에 환호했다. 
우주선을 타고 다니는 우주과학자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SF소설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외계인에게 납치당해서 연구하는 상상을 했어요. 
UFO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상상도 자주 했고요. 
광선총이나 펄스 대포 같은 무기에도 관심이 많아서 나름의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지요.”

그래서일까 집안의 물건을 분해했다가 재조립하는 일이 취미였다. 
계 라디오 냉장고 전화기 TV 등 뭐든 궁금한 것은 속을 뜯어봐야 했다.
재조립에 실패해 망가뜨린 뒤로는 뜯을 때부터 일일이 번호를 매기는 노하우도 생겼다. 
고등학생이 되어 문·이과 선택의 기로에서는 고민 한 번 없이 이과를 택했다.

물과의 만남은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물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대학 진학과 함께 시작됐다.
“재수를 거치며 대학 진학에는 성공했는데 원래 가고 싶었던 건축과는 성적에 밀려서 토목과로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 길을 만나게 됐습니다.”

토목과에는 물과 관련된 수업이 몇 개가 있었는데 이 수업들의 성적이 유난히 좋았다. 
하지만 김 위원은 이때까지도 운명을 깨닫지 못했다.
토목과 졸업생들이 대부분 건설회사에 취직을 하는 것처럼 그도 건설회사에 취업하려고 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중동에 불었던 건 설붐이 사그라들면서 건설회사 취업문이 바늘구멍이 돼 버렸다.

결국 1986년 자리를 잡은 곳이 당시 산업기지개발공사였던 한국수자원공사였다. 
처음 맡은 업무는 시화공업단지 조성을 감독하는 역할이었는데, 주된 담당자가 개인적인 이유로 물러나면서 갓 입사한 김 위원에게 중요한 책임이 주어졌다.

“미생물을 이용해서 썩은 물을 깨끗하게 바꾸는 일을 5개월 해보니 재밌더군요. 
처음에 생각했던 단지 조성과 같은 정통 토목보다 하수 처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습니다.”

하수 처리 분야는 미국이 발전돼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에 선배 한명이 회사 지원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저 공부를 더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더해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 순간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주위 사람들이 김 위원에게 미국 유학을 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유인즉 ‘영어를 잘 하니까’였다.

“정말 의아했죠. 
당시 제 영어 실력은 영문과였던 여동생이 인정했거든요. 
잘 하는 쪽이 아니라 못 하는 쪽으로 말이죠.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입사 이후 사람들이 저보고 영어를 잘 한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대체 뭐 때문에 이러나 궁금했어요.”

뒤를 캐다 보니 입사 때 봤던 회사 자체 영어 시험 성적이 만점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잘 몰라서 찍은 답이 죄다 정답이었다는 것. 
이후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면접에서 부사장이 갑자기 영어로 질문했는데 답을 잘 못하자 핀잔을 주던 일부터, 다음 입사자를 위한 영어 시험 출제위원에 참여했던 일까지.

김 위원은 우연찮은 오해를 이해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미국 유학이라는 목표가 생긴 만큼 영어 공부의 동기도 뚜렷했다. 
워낙 기초가 빈약했던 터라 유학을 위한 토플 점수를 얻기 위해 시험을 13번이나 봐야했다. 
매달 월급의 20%를 수험료로 투자하는 희생도 감수했다.

“덕분에 지금은 또래 사람들보다 영어 해독능력이 10배나 빠릅니다. 
금도 해외 보고서를 리뷰해서 발췌한 뒤 공유하는 일을 즐겨 한답니다.”

한번 공부에 불이 붙자 번져가는 속도가 대단했다. 
미국 대학원 입학자격시험(GRE)에서는 또래에서 점수가 가장 잘 나왔다. 
어학은 80점에 못 미쳤지만 수학은 만점, 분석력은 90점을 받은 것이다.

상수에 정착하자 열정이 샘솟다

그는 공부를 시작한지 2년 만인 1991년 회사의 지원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여기에는 또 다시 커다란 전환점이 숨어 있었다.
하수 처리에 대한 꿈을 안고 찾아온 김 위원의 지도 교수로 상수를 하는 분이 내정돼 있었던 것. 
기관 지원으로 온 유학생은 학부장이 지도교수를 맡는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반년이 지난 뒤에 지도 교수가 전공을 바꿀지 물어봤지만 이제 겨우 지도 교수의 말을 알아듣게 됐는데 짧은 유학기간에 또 적응기를 거칠 수 없다는 생각에 상수 쪽을 계속하기로 했다. 
평생의 길을 확정한 순간이었다.

그는 한번 발을 묻은 이상 더 깊게 들어가길 바랐다. 
무사히 석사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 일을 하면서도 박사 학위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결국 1997년 회사에서 박사 과정을 위한 유학 지원을 허락받았다.

술술 풀리던 김 위원의 인생길에 운명의 장난이 시작됐다.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회사에서 유학 지원이 어렵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불붙은 열정 앞에 어떤 장애물도 막을 수 없었다.

“박사 과정을 계획했던 대학의 여과 처리를 연구하는 교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분은 석사 시절 지도교수가 소개해준 분이에요. 
연구 조교로 받아 주시면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습니다.”

단번에 OK 확답을 받자 이제는 회사를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인의 공부를 위해 떠나는 상황이어서 휴직 처리를 해 주지 않으면 퇴직 밖에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도 퇴직을 하더라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고 설득하던 중에 다행히 휴직 처리를 해 주겠다는 회사의 답변을 받고서 만 41세가 된 이듬해 미국 유학길에 다시 오를 수 있었다.

회사의 확장과 함께 본인도 자라나

4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김 위원은 K-water가 세계적인 물 기업이 될 수 있도록 최신 기술을 연구하고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흔히 물 분야에 무슨 연구가 필요하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공장에서 쓰는 산업용수는 종류가 다양한 만큼 기술개발이 필수다. 
그 역시 물 사업의 초점을 산업용수에 맞췄다.

예를 들어 반도체 공장에는 가장 순수한 물이 필요하다. 
정밀한 반도체를 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장마다 정수 설비를 갖추기에는 효율이 떨어진다. 
정수 설비의 규모가 수천t 단위든 수만 수십만t이든 시설비나 관리비가 큰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 위원은 대규모 공단에 산업용수를 공급하는 설비를 마련하는 데 착수했다. 
현재K-water는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인 충남 서산의 대산공단에 12만t 규모의 산업용수 설비를 마련해 순수한 물을 공급하고 있다.

국내 3만개에 달하는 저수지를 서로 연결해 수자원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아이디어도 제안했다. 
각 저수지가 서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어디는 물이 넘쳐서 흘려보내야 하는데 다른 곳은 물이 부족해 쩔쩔매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댐을 새로 짓기도 어렵기에 기존의 저수지를 물리적으로 엮어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코리아워터그리드’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시스템은 현재 ‘스마트워터그리드’라는 이름으로 사업이 진행 중이다

현재 김 위원은 K-water가 추진하는 아시아와 남미 등의 수도개발 사업에 기술지원을 도맡고 있다. 
해외사업은 단순한 건설 능력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에 어떤 수질의 물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능력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가 오랫동안 쌓은 지식과 국내외에서 의 다양한 경험은 해외사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김 위원은 회사뿐만 아니라 자신도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사업기획실장, 해외사업처의 일을 맡으면서 자신이 변하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저는 혼자 일하는 건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었어요. 
하지만 남에게 부탁하는 건 어려웠어요. 
남을 설득하는 건 더 힘들었고요. 
어릴 적부터 ‘내가 기준’이라는 독선이 있었기 때문에 이걸 바꾸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연구만 할 때는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사업을 책임지는 자리에 선 뒤, 그는 고집을 꺾는 훈련을 해야 했다. 
일이 되게 하려면 많은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였다. 
사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작은 것 하나라도 빠짐없이 부탁을 해야 했고 누군가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결
국 그는 일을 통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능력을 배울 수 있었다.

체력 위에 열정과 희망을 더하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그였지만 새로운 목표를 향한 발걸음은 계속 된다. 
최근에는 물 산업 컨설팅 회사를 세울 계획으로 로고까지 만들었다.

“기술이나 공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법이나 회계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많지요. 
저는 경험을 통해 확보한 기술과 자본을 엮을 수 있는 통찰력을 활용할 생각입니다.”

제도나 예산을 다루는 사람에게 기술을 쉽게 설명할 수 있고, 공학자에게 의사 결정 체계와 회계를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을 회사를 통해 펼치겠다는 것이다.

특히 물 분야는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한데 돈만 있다고 뛰어들었다가는 장비의 내구성과 같은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처음에 돈을 더 들이더라도 안정적인 장비와 기술을 써야 꾸준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행착오를 거치며 배운 지식은 김 위원에게 경쟁력이 됐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수고했던 경험과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역지사지의 능력도 귀한 자산으로 남았다.

1957년생인 김 위원이 이처럼 힘차게 일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는 단언컨대 ‘튼튼한 체력’ 덕분이라고 밝혔다. 
그는 매일 4시 50분에 일어나 1시간을 걸어서 회사로 출근한다. 
사내 체력단련실에서 7시 20분까지 운동을 하고 샤워를 마친 뒤 8시부터 일과를 시작한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해요. 
이젠 백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앞으로 20년은 더 일해야 하는 거죠. 
마흔 넘어서 유학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체력 덕분입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려면 밤을 샐 수 있는 체력이 갖춰줘야 합니다.”

여전히 청년의 삶을 사는 그는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열정입니다. 
남들이 저더러 열정이 많아서 부럽다고 하는데 제가 세상을 보는 필터마다 다를 테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점점 좋아질 거라고 믿는 필터가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을 보는 필터는 저마다 다를 테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점점 좋아질 거라고 믿는 필터가 바로 열정입니다.

둘째는 희망을 강조했다. 
하찮아도 좋고 불가능해 보여도 좋으니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나만의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느새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열정과 희망이 있으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이건 제 삶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992&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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